해당 블로그의 모든 글은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은 작품 먼저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바디스' 볼 만합니다.
기승전결이 하나의 시즌에 담겨있으니 그냥 편안하게 보셔도 됩니다.
떡밥에 물려서 다음 시즌을 기다리게 될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디스'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네 명의 형사가 하나의 사건을 풀어가는 미스터리 SF 드라마입니다.
2023년, 형사 '샤하라 하산'은 시위현장에 동원되어 시위대를 주시하던 중 총기를 소지한 수상한 소년을 목격하고 추격 중에 롱하베스트 레인에서 소년과 함께 나체의 남성을 발견합니다. 남성은 사망했고 손목엔 특이한 문양의 문신과 왼쪽 눈에 총상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습니다.
1941년, 형사 '찰리 화이트먼'은 수상한 노부인에게 지령을 받아 롱하베스트 레인에 있는 시체를 로열 앨버트 부두로 가져가던 중 공습으로 인해 실패하게 되고 현장에서 탈출 후 해당 사건을 배당받아 직접 수사를 진행합니다.
1890년, 형사 '알프레드 힐링헤드'는 롱하베스트 레인에서 신원미상의 시체에 대한 신고를 받습니다.
나체의 이 시체는 기자 '헨리 애시'가 발견했고 그는 현장을 필름에 담습니다. 현상한 사진 속엔 유리창에 비친 정체불명의 신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2053년, 형사 '아이리스 메이플우드'는 통제구역인 롱하베스트 레인을 지나던 중 이상현상을 감지하게 되고 통제구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녀는 바닥에 누워있는 나체의 남성을 발견하고 본부로 즉시 보고합니다. 남성의 손목엔 특이한 문양의 문신과 왼쪽 눈에 총상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습니다.
클리셰 뒤에 무언가 있다
각기 다른 시대에 사는 네 명의 형사. 그리고 한 구의 시신. 영국의 미래를 구하려면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살인 사건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저는 넷플릭스의 작품 소개글에서 흥미를 느껴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으레 등장하는 복잡한 물리학 이론 및 역설들과 수사과정에서 단서를 쫓아 추리하고 범인과의 심리, 두뇌싸움의 스릴러등이 어우러진 범죄수사장르의 콜라보가 과연 얼마나 머리를 아프게 할까.
내 뇌가 이런 과부하를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시청을 하게 되...긴 개뿔!
수사물의 경우 더 이상 소재가 없단 말이 나올 정도로 이미 나온 많은 작품들을 통해 각종 장치가 소모된 장르고 시간여행 역시 패러독스가 정형화될 정도로 클리셰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미 포화될 만큼 포화된 영상 산업에서 장르나 소재의 진부함을 따지는 것 자체가 진부함이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 작품엔 앞서 제가 기대했던 복잡한 물리학 이론이나 치밀한 심리, 두뇌싸움은 없습니다.
짧은 찰나에 화면을 스쳐갈지도 모를 단서를 놓칠세라 집중해서 보지 않아도 되고요.
아니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저처럼 말이죠.
나름 해외 영상물에 대한 짬밥이 얼만데 니들 기믹 따윈 내가 모조리 파해쳐보겠단 마음가짐으로 장면전환마다 매의 눈으로 배경까지 훑으며 지켜봤습니다.
옆에 누가 있었다면 '아 이거 블록 우주론에 관한 거네. 아는 거임ㅇㅇ'하며 잘난척했을지도 모를 화면분할은 그냥 영상기법이었고 그 외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지켜보던 중에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드러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메시지
중반쯤 보다가 1화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보면서 처음에 보이지 않던 것들,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2023년의 형사 '샤하라 하산'은 인도계 흑인 무슬림 여성입니다.
그녀가 출동한 시위는 인종차별 관련 시위이고 중세갑옷을 입은 백마를 탄 사람은 가슴에 십자군마크가 있습니다.
뒷 따르는 사람들이 흔드는 깃발은 잉글랜드 깃발로 현대에선 주로 잉글랜드 출신 선수나 지역 스포츠팀의 응원에 쓰이지만 극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쓰이기도 한답니다.
시위대가 흑인인 '샤하라 하산'을 지나갈 때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며 조롱합니다.
반대편 시위대의 피켓을 보면 레이시즘에 반대하는 문구들도 보입니다.
1941년의 형사 '찰리 화이트먼'은 홀로코스트를 피해 독일을 떠나온 독일계 유대인입니다.
자신을 '칼'이라 부를 때 격한 반응을 보이는데 '칼'이란 이름은 고대 게르만족에서 유래한 독일식 이름이고 이것이 그가 독일계 유대인임을 말해줍니다.
극 중 동료인 패럴 형사(Inspector, 조사관)는 '찰리 화이트먼'에게 돈만 밝힐 줄 아는 유대인이라는 등의 편견 섞인 말을 합니다.
1890년의 형사 '알프레드 힐링헤드'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감춘 동성애자입니다.
19세기말 유럽에서의 동성애는 법적으로 처벌이 가능한 범죄였고 의학계에서는 정신병으로 취급하여 뇌절제술, 전기 충격등 고문에 가까운 치료가 이뤄지던 시기였습니다.
'알프레드 힐링헤드'는 본인의 욕망을 억누른 체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좀 특이했던 건 극 중 줄리언 하커(=일라이어스 매닉스)에 의해 그것도 두 번에 걸쳐 '그것은 잘못이 아니고 죄도 아니다. 그저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뿐이다'며 직접적인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다른 인종차별이나 편견 등에 대해서는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이렇다 할 메시지 전달이 없기 때문에 이걸 위해서 나머지 정치적 올바름은 끼워넣기한 건가 싶기도 합니다.
2053년의 형사 '아이리스 메이플우드'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입니다.
극 중 본인의 이복형제 역시 휠체어를 타는 걸 보면 뭔가 유전적인 요인이 아닐까 예상합니다.
스파인이라는 장비로 걷고 뛰며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함에도 본인이 스파인을 사용한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되자 당황하며 경직되어 버립니다. 이는 시대가 아무리 발전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가 없어져도 차별적인 시선과 편견이 여전함을 시사합니다.
네 명의 주인공 모두 인종, 민족, 종교, 신체, 성적 취향 등에 의해 박해나 편견을 받아온 사람들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전체적으로 극의 메인 플롯을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은근하게 전해지기 때문에 동성애 애정 씬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불편함 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마치며...
복잡한 내용도 없고 꼬인 트릭도 없습니다.
또 시즌 후반부에선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다시 한번 나열해 주기 때문에 이해 안 되는 부분도 딱히 없습니다.
괜히 떡밥만 뿌려대며 질질 끓다 용두사미 하는 드라마들 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양자역학, 양자광학, 블록 우주론(미래는 정해져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허상이다 등 후반 가브리엘 데포의 블록 우주론적 관점), 초대칭, 벌거숭이 특이점 등등 여러 이론과 가설이 뒤섞여 있고 일부만 참조해 그럴싸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알아야 이해된다거나 더 재밌게 볼 수 있다거나 그런 것도 없습니다.
대사분량이 있는 조연들의 경우 대부분 KYAL의 추종자인데 통수의 통수가 이어져서 조금 식상하긴 했습니다.
'KNOW YOU ARE LOVED'에 대해서도 다뤄볼까 하다가 관뒀습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사춘기 이전부터 대의를 위해 길러진 주인공의 애정을 향한 갈망의 표현'이란 말로 짧게 정리가 되더라고요.
뭐 다른 숨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여행물로서 보자면 자가근친 패러독스, 근원 없는 반복 패러독스입니다.
애초에 역설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죠.
자가근친 패러독스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 '타임 패러독스'라는 영화입니다.
로버트 하인라인 원작, 에단 호크 주연의 2014년 작품인데 안 보신 분들은 한번 보세요. 저는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바디스'를 보고 나서 생각했던 게 잘 만든 작품인가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떻게 감상을 하는가도 중요하다 새삼 느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시간여행에 대한 이론적 설명과 사건의 실마리에 대한 단서만 쫓다가 관점을 달리하고 작품을 다시 봤을 때 내가 이미 봤던 장면에서 새로운 게 보이는 그 과정이 저는 정말 즐거웠거든요.
각자 스타일이 있으니 내 즐거움의 포인트가 남과 같진 않겠지만 그래도 같이 즐거웠으면 해서 서두에도 작품 먼저 보고 오시라고 글 남긴 거고요.아무튼 다들 재미있게 잘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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